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문도 점령 사건 (문단 편집) == 거문도의 사정 == [[파일:8677_1.jpg]] 영국 군인들이 거문도 주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런저런 복잡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사실 거문도 사람들은 오히려 영국 해군을 환영했다. 일단 영국 해군은 이전에도 여러 번 조선에 상륙하여 서로 대접을 해 주고 간 적이 있어서, 거문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국 해군은 아예 낯선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영국 해군은 진지 보수나 포대 설치 작업 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을 ''''고용''''하여 작업에 동원했다. 그것도 조선인들에게 쓸모가 없는 [[파운드 스털링]] 대신 곡식, [[염장고기]], [[통조림]]이나 술 등의 보다 실용적인 물건으로 보상했으며, 식량 배급과 군의관의 의료 혜택까지 무료로 베풀었다. 나중에는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화폐를 따로 조달하기까지 했다. 이러니 거문도 주민들도 영국 해군을 물심양면 도와줬다고 한다. 몇몇 커뮤니티에서는 조선의 탐관오리에게 세금을 뜯기던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군을 만나 오히려 좋아했다는 내용이 돌기도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내용이다. 애초에 거문도는 너무 외딴 곳이라 조선에서 세금도 거두지 않고, 관리를 파견하는 대신 촌주가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두던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영국군이 점령했을 때 조선이 가장 늦게 알아차린 것도 관리가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관리를 파견하고 거문도를 적극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물러난 후 거문도를 거문도진이라는 일종의 군사기지로 만들면서다. 그리고 이 때도 주민들은 관리 파견을 환영했고 주변 지역에서도 자기들을 거문도진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자치로 굴러갈 때도 지역 유지들에게 빼앗겼으니 그럴 바에야 나라에서 관리하는 게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국 해군은 정부에서 보기에는 침략군으로 들어왔지만 거문도 주민들과는 마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민 물의를 최소화하려는 지휘관의 명령으로 주민들 거주 구역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과의 충돌이 있을까 봐 빨래터 근처를 지날 때는 각별히 주의를 가해 여자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물 한 모금을 떠마실 때에도 반드시 동전 한 닢을 두고 갔다는 회고도 있다. 자세한 기사는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363100006|여기]]에. 야사에 따르면, 거문도에 살던 젊은 여자 무당에게 반한 한 영국 수병이 몰래 수영을 해서 만나다가 바다에 빠지거나 중간에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가기 전해진다. 물론 실제로 그런 사건은 없었다는 것이 연구 결과이나 이런 야사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국군과 거문도의 백성들이 친밀했다는 이야기의 반영이라는 평가가 많다. 10여 년 전 방영했던 거문도 점령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거문도 주민이 전혀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줬는데, 당시 영국 수병이 무당 혹은 과부를 밤에 몰래 몇 번 찾아갔다가 발각되었고 조선의 남녀 유별 전통을 잘 아는 지휘관이 장병들과 거문도 주민이 보는 앞에서 강도 높은 처벌을 했다. 수병을 뱃머리에 세워두고 걷어차서 수병을 바다에 빠뜨리면 수병이 헤엄쳐서 배에 오르고 배에 오르면 다시 뱃머리에 세운 뒤 걷어차서 바다에 빠뜨리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르러서야 처벌을 그쳤다고 한다. 아마 이 에피소드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강도 높은 처벌이 본보기가 되어 특별히 알려진 대민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또 다른 일화가 나왔다. 당시 영국군이 장병들의 식량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소를 상당수 구입해서 거문도 산간에 방목했는데, 특별히 지키는 사람을 두지 않았다. 이를 보고 동네에 살던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매일 한 마리씩 훔쳐갔다고 한다. 영국군은 소가 한 마리씩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자 몰래 숨어서 훔쳐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은 뒤, 소가 사라진 다음날 노인을 붙잡고 훔쳐간 소를 돌려달라고 했다. 노인은 딱 잡아떼었지만 영국군이 노인이 소를 몰고가는 사진을 증거로 내밀자 결국 훔쳐갔음을 시인하고 소를 돌려줬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거문도 사람들은 사진이란 것을 몰랐는데 실물과 똑같은 모습이 종이 안에 있음을 보고 다들 놀라며 신기하게 여겼다 한다. 그러나 이 일화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19세기까지 정확한 사진촬영을 위해서는 피사체가 고정 된 상태로 10여초 정도 있어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코닥사의 최신 필름을 썼을 때의 이야기다. 소를 훔치는 사람의 움직임을 사진으로 담을 정도가 되려면 근거리에서 그 사람에게 일정한 동작별로 정지 자세를 요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 신기한 정도를 넘어 당시에는 너무 비슷한 그림 때문에 혼이 빠져나간다느니, 현상액이 사람 죽여서 만들었다느니 하는 괴담이 있었다. 단발령 때문에 겨우 사진이 대중화되었고, 그 전까지는 기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실 다른 비문명 민족들도 사진을 비슷하게 받아들였고, 아메리카나 유럽에서도 시골지역 사람들이 사진을 보면서 두려워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거나 일본의 메이지 덴노(단, 이쪽은 천연두 자국 때문에 그런 영향이 컸다)나 오스만 제국의 압뒬 메지트 1세도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는 일화가 있는 것도 보면, 딱히 조선인만 유별난 반응을 보인건 아니다.]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 주민들의 진술은 "자기네 여자 임금".]의 생일날에 축포를 쏘기로 했는데, 영국군은 사전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함포 소리에 놀라지 말라고 미리 당부를 해뒀다. 주민들은 대포 터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는데 문제는 이때 개들이 포 소리에 놀라 다 산으로 도망갔고, 영국 해군에서는 외교 문제를 고려하여 영국 해병대원들을 풀어 개 수색에 나섰다.[* 거문도 주민들도 영국 함포가 "댕구([[대완구]]) 소리"라며 조선 화포와 달랐다고 진술했는데, 이를 감안하면 거문도 주민들도 조선의 화포 소리는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과 별 연이 없었을 섬의 개들은 당연히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에서 최초로 테니스를 했다고 알려졌고,[* 1885년에 설립되었다고도 한다. 당시 테니스장이 건설된 위치로 추정되는 고도의 거문초등학교 인근에 해밀턴 테니스장이 건설되었다.] 통조림을 먹었다거나 하는 일화도 있다.[* 물론 조선 최초의 통조림 시식자는 [[신미양요]] 때나 그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영국군이 이렇게 거문도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살았던 것은, 영국군이 특별히 선한 이들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쪽이 영국 입장에서도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식민지가 펼쳐져 있는 영국의 입장에서는, 태평양 건너는 데 한 달이 걸리는 시대에 지구 반바퀴를 돌아 본국에서 물자를 보급하는 것보다, 점령지에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물자를 구하는 것이 민심을 얻으면서 작전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거문도 사건의 경우에도, 영국군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조선의 침탈이 아니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것이었기에 굳이 현지인과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이전보다 양적 규모를 줄이는 대신 질을 높이고자 했고, 여기엔 수병들의 봉급 향상과 같은 복지 개편 및 해군 예비역 제도 도입을 통한 수병들의 질적 수준 향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로 시민들을 납치해서 수병으로 징발하는 [[프레스 갱]]도 사실상 사라지고 해군 본부의 인사 부처에서 체계적으로 모병하여 충분한 훈련 후 배치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수병들의 군기 및 사기는 이전보다 더욱 향상되었고 따라서 민간인과의 관계도 큰 말썽 없이 이뤄질 수 있던 것. 오히려 영국 해군을 경계하기 위해 들어왔던 다른 나라의 군대들이 대체로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 해군]]은 군기가 문란하고 기강이 무너져 있어 행패를 자주 부렸으며 군사들이 죄다 술에 쩔어 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보니 현지 주민과 마찰이 특히 심각했고, [[프랑스 해군]]은 가는 곳마다 측량을 하겠답시고 지붕 위로 뛰어다녀서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나마 [[네덜란드 해군]]은 곱게 테를 두른 모자가 인상적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깃발을 많이 휘날렸다는 것 정도만 회고했다. [[https://www.pinterest.co.kr/pin/308144799474274324/|당시 네덜란드 해군의 복장에 대해서는 이 링크 참조.]][* 네덜란드는 이미 예전부터 일본 막부와 정규 거래를 해온 만큼 아시아인들을 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서 가능한 현상이다. 당장 그 유명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과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만 해도 일본으로 가려다가 좌초해서 제주도로 표류한 케이스였다.] 거문도에 영국군이 있을때, 젊고 똑똑한 청년 10명을 골라서 일본으로 보냈서 근대 학문교육을 하였다고 한다. 이중 한명은 서양법학을 공부하고, 서울로 귀국후 양반 사랑방에서 살다가 전주에 관료로 파견보내지었다. 동학혁명 후에 상당한 재산을 갖고 거문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가까운곳인 전남 장흥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들 10명이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궁금하다. 1960년대에 정부에서 그때까지 살아있던 거문도의 90대, 100대 노인들[* '''[[1870년대]]에서 [[1850년대]]생'''까지.]에게서 영국군의 지배가 어땠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노인들은 영국 해군들에게 배운 영어와 요들송을 그때까지 기억했다고 한다.[[https://blog.naver.com/joba34/140013714896|#]]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1588228976_228323909d_z.jpg|zz=1]] 거문도에 머물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수병들의 묘가 아직 2기 있고, 1900년대에 이 근방을 항해하던 영국 전함에서 사망한 수병 한 명의 묘도 있다. 영국과 영연방에 속하는 국가(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경우 해외 출정이나 주둔 중 전사한 군인은 그 땅에 묻는 전통이 있는 반면[* 영국은 워낙 식민지가 많다보니 자신들의 점령지 또한 엄연히 영국 본토와 같은 여왕의 영토 취급이었고, 이 때문에 현지에서 매장하는 것도 본국에 매장하는 것과 같은 취급이었다. 함상에서 전사 혹은 사망할 경우 [[수장(장례)|수장]]했으며, 시신을 본토까지 가져온 [[호레이쇼 넬슨]] 제독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 쪽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다. 또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영연방 국가 군인들의 유해도 대부분 부산의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채 남았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고국에 묻힘을 당연히 여겨 왔기 때문에, 당시 주민들이 '시신을 고향 땅에 묻어야지, 왜 그냥 두고 가냐.'고 일종의 [[문화충격]]을 경험했다고 전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 당시 거문도를 방문하여 묘소를 참배하고 가려고 했지만 일정이 바뀌어 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종종 주한 영국 대사가 와서 참배하곤 한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불법 점령군을 추모하는 웃긴 상황이지만, 2년간의 단기간 점거, 영국군의 신사적인 행동과 현지 주민과의 우호적 공존, 사건 자체에 대한 낮은 인식 등으로 한국에서도 이 사건이 별로 주목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딱히 없다. 거문도에 남은 묘의 비명들은 다음과 같다. 화강암 비석이 거문도 사건 당시 사망한 영국 수병의 묘이며, 흰 나무 십자가는 그로부터 시간이 약간 흐른 1903년 세워진 묘이다. 거문도 사건 당시 사망한 영국 병사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1886년 3월 알바트로스(Albatross) 함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머레이(William J. Murray)와 17세 소년 찰스 데일(Charles Dale). 십자가에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다. >1903년 10월 3일 알비온 함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 게다가 2년의 짧은 점령기간이었지만, 영국 해군은 [[해저 케이블]]까지 설치하여 상하이를 통해 본국과의 연락을 주고 받았다. 조선 정부가 이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을 통해 빙빙 돌아 영국으로 거문도 점령 사건에 대한 항의 서한을 보낸다. 영국군이 설치한 케이블은 현재 고도 해안가에 그 일부가 남아있다. [[http://m.gwangnam.co.kr/article.php?aid=1563696487332402112|#]] 또한 영국 해군 동양함대는 1930년대까지 비정기적으로 거문도에 기항했으며, 2005년부터 [[주한영국대사관]] 명의로 거문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5/07/09/story_n_7759520.html|관련 기사]] [[홍콩]]처럼 조차지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홍콩과는 달리 거문도는 면적도 너무 작고 정주여건이 열악한 편이라 결국 거문도가 별로 쓸모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물러났다. 사실 영국령이 쭉 유지되었다고 해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반환했거나 섬 자체의 여건상 영국령 해외 속령처럼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